
그림 1.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지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베네룩스 삼국’은 사실 중세의 한 ‘실험’에서 비롯했다. 세 나라는 면적은 작지만 인구 밀도가 높고 부유해 유럽 정치·경제의 핵심 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네룩스’라는 이름으로 관세동맹을 맺었고, 1965년에는 공동 법원(베네룩스 법정)으로 사법 협력까지 시작했다.
이 일대는 전통적으로 해수면보다 낮은 지형이 많아 ‘저지대 지방’(The Low Countries)이라 불렸다. ‘네덜란드’라는 국명 자체도 네덜란드어로 ‘저지대’를 뜻한다.
중프랑크 왕국과 저지대의 지정학
그림 2. 로타링기아(중프랑크 잔여)의 분할 지도
저지대는 한때 프랑스(서프랑크)와 독일(동프랑크) 사이의 완충지대인 중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다. 왕가 분할과 단절, 자연 방어선의 부재, 다양한 지역 정체성(저지대·로렌·부르고뉴·프로방스·이탈리아)이 겹치며 왕국은 분해되었다
저지대는 로타링기아로 묶였다가 동프랑크(후일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며, 황제의 분할·견제 정책 아래 수많은 세속 제후국·주교후국·자치도시가 병존하는 분권적 환경이 갖춰졌다.
저지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저지대에는 11세기 이후 습지 개간과 바다 간척을 통해 대규모 농지가 형성되었다. 12~13세기 플랑드르·브라반트의 양모 산업, 14세기 홀란트·제일란트의 청어 어업이 번성해, 저지대는 프랑스·독일 내륙·발트해·이탈리아를 잇는 무역 허브로 성장했다. 도시가 강했지만 도시국가로 가기보다는 ‘도시–영주 공존’의 균형이 자리를 잡았다.
부르고뉴의 저지대 통합 실험
그림 3. 용담공 샤를 시기의 부르고뉴 복합국 최대 판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결혼·상속·정복·정략으로 저지대와 부르고뉴의 작위를 대거 손에 넣었다. 화려한 궁정 문화 후원과 엘리트 포섭으로 귀족과 도시를 묶고, 저지대 각 영토 대표가 참여하는 신분제 의회를 소집해 통합의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이어서 중앙집권을 정비하고 양측(저지대·부르고뉴)에 고등법정을 설치, 세수를 바탕으로 유럽 선도적 상비군을 갖췄다. 새 왕국 승격 시도는 주변 반발 속 전쟁과 군주의 전사로 좌절됐다.
카를 5세의 제국과 ‘스페인 통로’, 그리고 펠리페 2세
그림 4. ‘스페인 통로’(밀라노–브장송–룩셈부르크)와 중프랑크 왕국 영역.
부르고뉴 계승 전쟁 뒤 저지대는 합스부르크의 손에 들어갔다(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카를 5세는 조부모들을 통해 저지대·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페인을 상속받아 북해-지중해-대서양을 잇는 사적 제국을 구축했다. 본거지는 저지대였다(겐트 출생, 브뤼셀 집정, 브뤼셀 퇴위).
카를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를 행정 통합하고 제국 내 부르고뉴 제국관구로 특화해 ‘저지대’라는 단위를 공고히 했다. 동시에 밀라노와 저지대를 잇는 스페인 통로를 열어 회랑을 연결했는데, 이는 중프랑크의 축을 사실상 재현한 셈이었다.
가혹한 과세와 종교 탄압도 있었지만, 저지대 엘리트를 등용하고 일부 조치는 완화하는 등 카를은 ‘저지대 군주’라는 인식이 분명했다. 반면 아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식 중앙 통제를 밀어붙였고, 귀족 탄압과 종교 문제로 대규모 반발을 초래했다. 이것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8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베네룩스 3국의 성립
그림 5. 1839년 런던 조약 이후 분할. 네덜란드(1·2), 벨기에(3·4), 룩셈부르크(5)
독립 전쟁은 북부의 개신교 세력과 남부의 가톨릭 세력을 갈라놓았고, 스페인의 공식 승인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이 성립했다. 남부는 오스트리아령을 거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체제를 통과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빈 체제 후 열강은 남부를 네덜란드에 붙여 연합왕국을 만들었지만, 이미 종교·정치·경제의 체질 차가 커 1830년 벨기에 혁명으로 분리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서부(왈롱어권)가 벨기에로, 나머지는 네덜란드와 동군연합·독일 연방 사이의 이중 연결로 남았다가, 강대국의 조정을 거쳐 영세 중립을 보장받으며 독립했다.
결론저지대는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제3의 공간으로, 부르고뉴의 통합 실험과 카를 5세의 제도화(제국관구·통로)를 거치며 정치적 실체를 획득했다. 카를의 사적 제국은 중프랑크처럼 긴 국경과 이질성의 벽에 부딪혀 무너졌지만, 그가 남긴 제도와 엘리트·도시 네트워크는 응집력으로 전환되어 오늘의 베네룩스 삼국을 떠받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① 저지대의 경제 발전, ② 부르고뉴 가문의 통합 전략, ③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통치 비교, ④ 독립 전쟁의 지정학(스페인 통로)을 차례로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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